잡담2018. 6. 17. 23:09

어처구니없는 미술사 어쩌고 배웠다는 소위 말하는  '문화 운동가'님의 우문에 석가쌤의 현답.
그 기사 읽으면서 배웠다는 애가 오히려 상식선 이하로 생각하는 현상을 보니.역시 그림 아니 예술은 관점 싸움이라고 생각된다. 관점을 넘나 들어야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자신이 배웠다는 관점에 붙잡혀 모든걸 파악하기 시작하니 저 간단한 상식에도 어처구니 없는 답을 해버린다......



'대학 교육에서 왜 누드 수업이 필요한가' 이 질문은 비단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비전공자 뿐 아니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도 종종 듣는 질문입니다. 저는 미학이나 미술사 전공이 아니라서 누드 드로잉에 대한 역사적, 철학적 의미는 어림 짐작할 뿐이지만, 주로 인물을 그리는 그림꾼으로써 그 실질적인 유용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미술대학에서 '누드'를 그리는 것이 필수인 이유는 단순히 누드가 일상에서 보기 힘든 '드문 풍경'이라거나, 막연히 '예술의 자유'를 상징한다거나, 단순히 '아름다운 모습'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대체 왜 누드를 그려야 하는지 실용적인 관점에서 간단히(?)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 먹은 사람이라면, 가장 잘 그리고 싶은 대상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사람'일 뿐 아니라, 태어나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동물이며, 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잘 표현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화가들의 주요 관심사이자 숙제가 되어왔지요.

그러나 사람을 그리는 것은 꽤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 전문가죠. 그래서 호랑이의 줄무늬 개수가 모자라거나 기린의 목 길이가 조금 짧은 것은 느끼지 못해도, 사람 앞니 사이의 미세한 고춧가루는 금방 찾아냅니다. 같은 이치로 실제 모델과 굳이 비교해보지 않더라도, 드로잉 결과물의 어색한 점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을 그리는 일은 미술학도에게 아주 기본적인 훈련이 됩니다. 어려운 사람을 잘 그릴 수 있다면, 다른 사물을 그리는 것도 어렵지 않겠죠. 그래서 사람을 그리는 능력은 흔히 '데생력'의 상징적인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을 그리는 건 그렇다 치는데, 왜 하필 누드인가. 
먼저, 어떤 대상을 잘 그리기 위해서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면밀한 '관찰'행위가 필요하겠지요. 사람을 잘 그리려면? 당연히 사람을 잘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옷'입니다.

1. 옷은 사람의 몸 위에 두르는 얇은 천에 불과하죠. 하지만 일단 그것이 몸에 걸쳐지는 순간 - 상하의의 구분, 재봉선과 주름, 무늬와 주머니, 소매구멍에 의해 - 몸의 안팎을 가로와 세로로 나누는 많은 '선'(Line)이 추가됩니다. 꾸미는 말이 많아지면, 본 말뜻을 헤아리기가 힘들어지죠? '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에는 등허리의 척주를 중심으로 전신을 흐르는 관념적인 '큰 선'이 존재하는데, 의복에 의한 '잔 선'이 많아지면 선뜻 큰 선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걸림없이 하나로 이어진 몸의 본 모습을 봐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2. 누드 수업에서 자주 하게 되는 '크로키'(Croquis)는 한 마디로 말해 이 '큰 선'을 찾는 '주제 파악 훈련'입니다. 카메라가 없던 과거에는 대작을 그리기 위한 부분 자료 기록용의 의미도 있었지만, 현대에는 제한된 짧은 시간 내에 인체가 취할 수 있는 다양한 포즈의 핵심을 짚어내어 간결하게 표현하는 훈련의 의미가 부각되었죠. 어떤 장르의 예술이건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데, 형식이 무엇이든 '주제'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면 예술로 대접받기 어렵습니다.

3. 우리 몸은 '큰 선' 외에도, 근육과 지방에 의한 크고 작은 수많은 굴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곡선을 실체에 가깝게 표현하는 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보이게 만들기 위해 굉장히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종류의 옷은(아무리 타이트한 재질이라 해도) 그 곡선을 가리거나 뭉뚱그려버립니다.

더군다나 인체는 움직이기 위해 650여개의 근육을 거의 모두 사용합니다. 아시다시피 근육은 수축하면 돌출되고 이완하면 펴지는데, 어떤 근육무리가 작용하는가에 따라 특정한 포즈나 움직임이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전신의 굴곡이 미묘하게 변합니다. 자세와 균형, 무게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굽힘근과 폄근/ 주작용근과 저항근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왜? 중력에 맞서야 되니까요. 언뜻 보기에 운동이 될까 싶은 요가나 필라테스가 효과가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이 현상은 단지 인체의 세세한 굴곡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명체의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죽으면 근육이 움직일 필요가 없고, 굴곡을 만들어 낼 일 또한 없으니까요. 화폭에 생명력을 담고 싶어하는 건 화가의 절절한 바람이기도 하죠.

4. 사람은 '동물'입니다. 죽으면 '정물'이 되죠. 동물과 정물을 그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동물은 '움직이기 위한 디자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디자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물'을 봐야 됩니다. 동물을 정물화시킨 교재, 즉 사진자료만으로 공부하면 명백한 한계에 부딪히거든요.

모니터나 책으로 보는 2차원의 누드와, 실제 3차원의 누드는 다릅니다. 벗은 모습은 똑같은데 뭐가 다르냐고요? 2차원과 3차원,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르죠! 인쇄된 상태의 완벽히 정지된 인체의 형상은 보고 그리기에 편리할지 몰라도, 생동감을 담기는 어렵습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야외 스케치'를 나가보신 경험이 한 번쯤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을 보고 그려도 되는데, 왜 귀찮게 굳이 나가는 걸까요? 사진 속의 꽃과,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눈 앞의 꽃은 우리의 감각기관과 인식체계를 자극하는 정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상통화로 만나도 될 사람을, 왜 직접 만나고 싶어하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평면으로 옮기는 '차원 변환' 작업을 위해, 작가는 필사적으로 모든 시지각적 능력과 연산을 동원해야만 합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어떤 부분을 살리고 생략해야 하는지 쉴새없이 판단해야 하니까요. 더군다나 정지 포즈라고는 해도 중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자세가 조금씩 변하는 살아있는 인체의 장면장면은 그 순간이 지나면 영원히 다시 볼 수 없게 됩니다. 작가는 그 순간의 장면을 자신의 손을 통해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화면에 집중하게 됩니다. 같은 누드라도, 사진의 누드보다 실제의 누드를 그렸을 때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지요. 그림을 배우는 입장에서는 이만한 트레이닝도 없습니다.

5. 살아있는 대상을 그리는 게 효과적이라면, 동물원에 가서 동물을 그리는 것으로도 훈련이 되지 않을까요? 물론 됩니다. 그러나 굳이 사람을 그리는 이유는 '모델' 자체가 사람이기 때문에 관찰자를 의식해 자신의 몸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고(물론, 소양이 없는 모델도 있긴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우리 자신이 사람에게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죠.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연습에 방해가 되기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림을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대상을 바라보는 주관적인 시각이나 '정념'(감정에 따르는 생각)을 최대한 눌러두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그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정념'을 담기위한 단단한 그릇을 만드는 과정과 다르지 않죠. 정제된 정념이 담긴 그림은 '예술작품'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미술대학은 시각 예술가를 길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는 만큼 누드 드로잉을 통해 학생 개개인의 몸에 대한 관점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표현력이 어느 선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몸의 여러 의미와 아름다움을 되새기는 교육과정이 필요합니다.

수 세기에 걸쳐 '누드'가 화가들에 의해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나타내는 도구이자 효율적인 연습 과제가 되어 온 것은 대체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누드가 가지는 효용성은 두고두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주제라 생각합니다.

확실히, 몇 세기 전에 비해 누드 회화 작품이 대중의 흥미를 끌기에 고루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몸을 그리고 연구하는 일 마저 불필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관객에게 지루한 클래식을 대체할 음악이 많아졌다고 해서, 음대에서 다룰 필요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 처럼요. 
누드 드로잉은 사람의 몸이 가진 많은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입니다. 저는 그래서 개인적으로, 미술대학 뿐 아니라 자신의 몸을 도구로 예술을 만드는 음악, 무용, 연극대학과 사람의 몸을 다루는 의과대학에서도 '누드 드로잉'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다른 이의 몸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몸에 대한 경외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자,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학문이란 '인간'을 더 잘 알기 위한 한 점에 닿아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석쌤 facebook에서 인용.



Posted by square08